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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으로 이어진 기억의 의식, 동티모르의 ‘타이사 마트린 축제’

by clickissue 2025. 7. 26.

 

천으로 이어진 기억의 의식, 동티모르의 ‘타이사 마트린 축제’

동티모르의 ‘타이사 마트린(Tais’a Matrín)’ 축제는 여성 공동체가 전통 직물 ‘타이(Tais)’를 짜며 독립 전쟁의 상처와 기억을 치유하는 의례적 문화 행사입니다. 한 땀 한 땀에 조상과 땅, 여성의 생애를 새기는 이 축제는 직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민족 정체성과 공동체 복원, 여성 주체성의 힘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섬의 역사와 영혼을 실로 엮는 장엄한 예술이자 사회 운동입니다.

섬과 여성, 직조된 정체성의 기억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 이 나라는 2002년, 수십 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식민 지배와 독립 투쟁 끝에 세계에서 가장 젊은 주권국 중 하나로 탄생했습니다. 이 짧지만 처절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전투뿐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과 정체성을 직조하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해 왔습니다. 그 상징을 가장 깊게 담아낸 문화적 유산이 바로 ‘타이(Tais)’입니다. 이는 동티모르 전통 직물로, 손으로 짜서 만든 천에는 각 부족 고유의 문양과 색이 담기며, 조상과 땅, 여성의 삶이 실과 날 사이에 새겨집니다. 타이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결혼과 출산, 장례, 화해와 축복의 모든 의례에서 사용되는 영혼의 천입니다. ‘타이사 마트린(Tais’a Matrín)’은 매년 5월, 동티모르 독립기념일 즈음에 열리는 축제로, 직물 작업을 통해 공동체의 기억을 잇고,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의례입니다. 이름은 ‘타이로 서로를 연결하다’는 뜻이며, 이는 말 그대로 여성들이 짜는 천이 개인과 부족, 공동체를 하나로 엮는 매개가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이 축제는 단순한 민속행사가 아닙니다. 독립 전쟁의 상처, 여성에 대한 침묵된 폭력, 지역 간 갈등을 치유하고, 젊은 세대에게 구전되는 비공식 역사 교육의 장이기도 합니다. 타이는 바로 이 모든 것의 매개입니다.

한 땀에 깃든 기억, 실에 얽힌 저항

타이사 마트린 축제의 중심은 ‘공동 직조 의례’입니다. 여성 장인들이 마을 중심 광장에 모여 전통 베틀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천을 짜기 시작합니다. 이 의례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습니다. 참가자는 반드시 가족 중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을 기억하며, 그 기억을 상징하는 문양이나 색을 넣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검은 실을 교차시키며 죽음을, 어떤 이는 붉은 띠로 저항을, 또 다른 이는 푸른 선으로 평화를 표현합니다. 이 과정은 종일 이어지며, 마을의 노인들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쟁 중 아이를 숨기기 위해 천 속에 싸서 산속을 달렸던 경험, 인도네시아군의 감시 속에서 몰래 직조를 이어가던 밤들, 천을 거래하며 생존을 이어갔던 공동체 여성들의 연대가, 그들이 짜는 실에 함께 얽혀갑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짜인 타이들을 하나의 큰 천으로 연결해 마을 광장 중앙에 세웁니다. 이때 남성들은 북을 두드리며 조상과 대지의 영혼을 부르는 ‘우나르(Unaar)’ 의식을 진행하고, 여성들은 노래와 춤으로 응답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화 퍼포먼스가 아닌, 상처받은 섬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심리적 의례입니다. 이와 함께 젊은 세대를 위한 ‘직조 워크숍’도 열립니다. 젊은 여성들이 장인들로부터 직접 기술을 배우며, 역사와 기술, 문화의 연속성을 이어받습니다. 이곳에서 타이는 패션이 아닌 삶의 언어로 다뤄지고, 실 한 줄이 조상의 이름이자 여인의 역사로 읽힙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타이 미사’가 열립니다. 이는 짜인 천을 성소로 들고 가 신부가 축복을 내리는 장면으로, 전통과 신앙, 기억과 공동체가 하나로 모이는 상징적 피날레입니다.

직조의 예술로 회복된 섬의 영혼

타이사 마트린은 단순한 전통 축제가 아닙니다. 이는 여성의 손을 통해 이뤄지는 사회적 치유이자, 직조를 통한 역사 기록이며, 천을 매개로 공동체가 다시 자신을 꿰매는 영적 복원입니다. 실과 무늬, 땀과 기억, 그리고 노래와 춤이 함께 직조되어 섬 전체를 감싸는 이 축제는, 문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집니다. 동티모르의 타이는 보기엔 소박한 천이지만, 그 안에는 나라의 독립, 여성의 저항, 조상의 숨결, 공동체의 약속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년 다시 짜고, 노래하며, 나누는 의례는,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행위가 아닌, 현재를 살아내는 저항이자 실천입니다. 이 축제는 외부 세계로 향한 동티모르의 문화 선언이자, 안으로는 상처 입은 자신을 돌보는 치유의 기도입니다. 그 모든 것이 천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 형식을 통해 이뤄집니다. 이제 우리는 타이의 무늬를 통해, 그들의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실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섬의 심장까지 닿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