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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씻는 시간, 수리남 마로온족의 ‘윈티 데데’ 정령 축제

by clickissue 2025. 7. 25.

 

영혼을 씻는 시간, 수리남 마로온족의 ‘윈티 데데’ 정령 축제

남미 수리남의 마로온족 공동체는 매년 ‘윈티 데데(Winti Dede)’라는 축제를 통해 조상과 정령의 세계와 교감하며, 정화와 치유의 의식을 행합니다. 춤과 노래, 드럼 리듬, 몸의 진동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영혼을 정화하는 이 의례는 아프리카 전통과 남미 원주민 신앙이 융합된 독특한 영성의 표현이며, 수백 년에 걸친 저항과 기억, 연대의 역사를 품은 축제입니다.

혼과 몸이 만나는 축제, 윈티의 부름

수리남은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에 자리한 다민족 국가로,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이주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열대 우림으로 탈출해 자유를 찾았고, 이들은 ‘마로온(Maroon)’이라 불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됩니다. 수세기 동안 숲 속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온 마로온족은, 아프리카의 신앙과 남미의 정령 신앙, 기독교적 요소가 혼합된 ‘윈티(Winti)’라는 독특한 신앙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 신앙의 중심에는 조상과 정령, 자연과 인간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세계관이 있으며, 이를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장치가 바로 ‘윈티 데데(Winti Dede)’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일종의 ‘영혼 정화의식’으로, 마을 전체가 수일간 금식을 하며 조용한 준비를 거친 뒤, 특정한 정령의 날에 맞춰 의식을 시작합니다. 의식의 공간은 주로 숲속의 공터나 공동체 중앙에 마련된 제단 앞이며, 정령을 상징하는 색깔의 천, 꽃, 음식, 물, 향료, 악기 등이 준비됩니다. 참여자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머리에 천을 두른 채 정화된 상태로 의식에 들어가게 되며, 이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존재의 리셋’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상징성과 정서적 깊이를 지닌 경험입니다.

드럼의 진동, 신과 인간 사이의 언어

윈티 데데의 핵심은 드럼입니다. 전통 드럼 ‘아포푸(Apopu)’와 ‘쿰바(Kumba)’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정령과 인간을 연결하는 진동의 매개체로 여겨집니다. 의식을 주관하는 ‘오비아(Obia, 무당 역할)’는 드럼 소리를 통해 정령의 메시지를 해석하며, 때로는 참가자의 몸에 정령이 깃들기도 합니다. 이는 몸의 떨림과 언어의 변화, 표정, 손동작 등을 통해 표현되며, 마치 살아 있는 예언의 장면처럼 펼쳐집니다. 무당은 드럼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신체를 통한 대화를 시작합니다. 주변의 참가자들은 노래로 호응하며, 합창은 정령의 이름과 그들의 속성을 반복적으로 외칩니다. 예를 들어 물의 정령 ‘Aisa’가 나타나면 부드럽고 흐르는 리듬이 중심이 되고, 불의 정령 ‘Fodu’가 나타나면 격렬하고 강한 드럼이 울리며, 참여자들은 뜨겁게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러 그 존재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참여자 개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기운, 고통, 상처 등을 ‘정령에게 맡긴다’는 방식으로 정화 과정을 겪습니다. 이 과정은 눈물과 춤, 고함과 웃음, 그리고 침묵과 기도가 뒤섞이는 카타르시스를 동반하며, 정령은 참여자에게 메시지를 주거나 치유의 에너지를 나눠주게 됩니다. 의식은 종종 새벽까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제단에 바친 음식과 꽃을 모두 강물이나 숲에 흘려보내며 마무리됩니다. 이는 ‘모든 에너지는 순환한다’는 신념의 실천이며, 조상과 자연, 정령과 인간이 하나 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기억의 제례, 영혼의 연대

윈티 데데는 단지 신비한 정령의식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저항과 정체성 회복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식민의 억압 속에서 도망쳐 숲에 정착했던 마로온족에게 있어 이 축제는 생존의 선언이자 자유의 재확인이었습니다. 몸으로 기억하고, 드럼으로 말하며, 춤으로 해방되는 이 의식은 그 어떤 문서보다 더 강력한 문화의 증언입니다. 오늘날 수리남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카리브 제도 등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도 윈티 데데가 재현되고 있으며, 이는 문화의 국경을 넘어선 전승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마로온족의 후손들은 이 축제를 통해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하고, 현대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정신적 나침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현대의 축제를 ‘소비의 장’으로 받아들이지만, 윈티 데데는 그와 반대편에 선 존재입니다. 그곳엔 상품도, 무대도 없지만,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고통과 치유, 공동체와 고요한 믿음의 리듬입니다. 드럼이 울리고, 정령이 오며, 사람들은 춤춥니다. 그 춤은 단지 축제가 아니라, 삶을 끌어안는 방식이며, 살아 있음을 선언하는 언어입니다. 그것이 윈티 데데가 오늘도 이어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