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키츠 네비스의 ‘네고릴리아 카니발(Negorillia Carnival)’은 아프리카 뿌리와 카리브 해방 정신이 결합된 대규모 퍼레이드 축제입니다. 현란한 탈춤, 스틸밴드 음악, 깃털과 비즈로 장식된 의상, 드럼의 폭발적인 리듬 속에서 공동체는 자유를 기념하고, 식민의 기억을 춤과 음악으로 극복합니다.
섬 위의 몸짓, 뿌리에서 피어난 저항의 예술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세인트키츠 네비스는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노예 후손들의 삶이 집약된 지역이다. 작지만 강한 문화 정체성을 가진 이곳에서 매년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열리는 ‘네고릴리아 카니발(Negorillia Carnival)’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해방과 자긍심, 그리고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을 되살리는 거대한 문화적 몸짓이다. ‘네고릴리아’라는 이름은 ‘Negro’(아프리카계 사람)와 ‘Gorilla’(원초적 힘의 상징), 그리고 ‘Carnival’을 결합한 조어로, 전통을 기반으로 한 저항과 에너지, 그리고 탈식민 시대의 자각을 함축하고 있다. 이 축제는 도시 중심에서 시작되어 해안까지 퍼레이드가 이어지며,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을 동시에 기념한다. 이 축제의 뿌리는 식민지 시대 노예 해방을 기리는 의례에서 출발한다. 초기에는 종소리와 북소리로 조용히 시작되었으나, 현대에는 섬 전체가 들썩이는 음악과 춤, 상징적 의상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그것은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몸의 대답이다. ‘네고릴리아 카니발’은 아프리카, 카리브, 유럽, 현대 힙합 요소까지 어우러진 혼종 문화의 결정체로, 이 섬 주민들의 역동성과 창조성, 그리고 끈질긴 생존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드럼의 심장, 탈의 언어, 자유의 춤
‘네고릴리아 카니발’의 핵심은 퍼레이드다. 수천 명의 주민들이 퍼레이드 팀을 구성해 거대한 거리극을 연출하는데, 이들은 각자의 테마와 메시지를 담은 의상을 입고, 몸에 빛나는 오일을 바르며, 머리에는 깃털과 조개, 거울, 비즈로 장식된 탈을 쓴다. 퍼레이드는 전통 아프로카리브 드럼라인과 스틸밴드, 전자 힙합 사운드가 어우러져 거리를 진동시킨다. ‘주바(Juba)’ 리듬, ‘레게’, ‘소카’, ‘칼립소’, 그리고 ‘댄스홀’까지 음악의 장르는 경계를 넘나들며, 모든 사람을 춤추게 만든다. 특히 ‘마스크 행렬(Mask March)’은 이 축제의 상징이다. 주민들은 식민지 시절 억압자들의 형상을 풍자하는 탈을 쓰거나, 아프리카 전통 신령의 얼굴을 재현한 탈을 쓰고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정치적 상징이자 역사에 대한 저항이다. 무대 공연도 다채롭다. 젊은 래퍼들이 자유에 대한 가사를 읊조리고, 전통 댄서들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리듬을 변형한 춤을 선보인다. 심지어 어린이 퍼레이드도 열려, 아이들이 직접 만든 소형 드럼과 깃털 장식을 들고 거리를 누비며 ‘미래의 주인공’으로서 축제에 참여한다. 의상 경연 역시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왕과 여왕’ 콘테스트에서는 가장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의상을 입은 참가자가 뽑히는데, 이들의 옷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스토리를 가진 ‘움직이는 조각’이다. 해방의 역사, 조상의 전설, 희생의 기억, 그리고 희망의 미래가 의상에 담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행위가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축제를 준비하는 수개월 동안 섬 주민들은 직접 의상을 만들고, 악기를 조율하며, 춤과 노래를 연습한다. 이 과정 자체가 공동체를 묶는 끈이며, 기억을 잇는 고리다.
우리는 춤으로 말하고, 리듬으로 존재한다
‘네고릴리아 카니발’은 단지 즐기는 축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해방, 창조와 저항, 공동체와 희망을 동시에 품은 살아 있는 문화적 언어다. 드럼의 울림은 조상의 심장박동이고, 춤추는 몸짓은 억눌린 역사를 뒤흔드는 해방의 외침이다. 세인트키츠 네비스라는 작은 섬나라는 이 축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외친다. 우리는 과거의 희생을 잊지 않고, 현재의 자유를 감사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축복한다고. 그리고 그 외침은 말이 아니라, 리듬과 몸짓, 탈과 깃털, 북과 소리로 전달된다. 이 축제를 보는 사람은 단지 관객이 될 수 없다. 음악이 시작되면, 리듬이 몸을 휘감고, 무대와 거리가 사라지며, 누구나 이 거대한 기억의 퍼레이드에 참여하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고, 답을 찾는다. ‘네고릴리아’는 잊지 않기 위한 춤이고, 잇기 위한 노래이며, 모두를 위한 울림이다. 그리하여 그날 거리 위에서 사람들은 자유로, 리듬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존재한다.